양치기 소년을 위한 변명

(영화 Non-Stop 포스터)
2014년 2월에 개봉한 영화 “논스톱”(Non-Stop)을 보았습니다. 영화배우 리엄 니슨(Liam Neeson)이 주인공 빌(Bill)로 나옵니다. 영화 앞부분의 줄거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항공수사관(air marshall) 빌은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탑니다. 이륙하고 얼마 뒤에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받습니다. 어느 협박범이 보낸 것입니다. 1억 5천만 달러가 입금될 때까지 20분마다 한명씩 죽이겠다는 내용입니다. 누군가의 장난일지 모른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반인은 모르는 보안통신으로 온 문자메시지입니다. 승객이 150명이나 됩니다. 이 협박이 진짜라면 막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장에게 알렸으나, 좀처럼 믿지 않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통보안청(TSA) 소속 상관도 그 협박이 가짜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정된 20분이 지났을 때, 한 사람이 죽습니다. 협박범의 소행일 수도 있으나, 우연한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교통보안청은 빌을 의심하고, 기장으로 하여금 빌의 총과 휘장을 압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은 독단적으로 승객들을 조사합니다. 다시 20분이 지났을 때, 한 사람이 더 죽습니다. 이번에는 사인조차 알기 힘듭니다. 빌은 직위해제를 당합니다. (이 뒤는 생략합니다.)

주인공 빌이 볼 때, 협박범의 위협이 말뿐인 거짓일 수도 있고, 실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위협이 진짜라면 신속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무시하다가는 승객 중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협이 거짓인데도 수색한다면 승객들은 괜한 불편을 겪습니다. 기장이나 상관은 위협이 거짓으로 보이니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습니다.

구분협박범의 위협이
거짓일 때진짜일 때
주인공이무시한다면아무 문제 없다승객 중
사상자가 발생한다
수색한다면승객들이 괜히
불편을 겪는다
승객들을
지킬 수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승객들에게는 ‘무작위로 선정된 수색 대상 비행기’라고 속이고, 믿을 수 있다고 보이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수색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승객들의 반발은 무척 거셉니다. 그 과정에서 다치는 사람도 발생합니다. 이제 주인공 빌이 바로 납치범이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만약 위협이 거짓이라면, 비행기가 런던에 도착한 뒤에 빌은 무척 큰 고초를 겪을 것입니다. 직위해제된 상태에서 무리한 수색을 했고, 그 과정에서 크게 다치는 사람들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공익과 관련됩니다. 많은 사람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일도 있습니다. 그런 일에서 담당 공무원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적은데다 주어진 시간도 짧다면 무척 힘든 상황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빌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릴 때 읽었던 이솝우화를 떠올렸습니다. 등장인물도, 배경도, 사건도 무척 다릅니다만, 분명한 공통 요소들이 있습니다. 다음은 “양치기 소년과 늑대”(The Boy Who Cried Wolf)라는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 양치기 소년은 거짓으로 “늑대가 나타났다”며 외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오자, 늑대가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며칠 뒤에도 비슷한 일이 다시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소년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며칠 뒤에 진짜로 늑대가 나타납니다.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달려오지 않습니다. 소년은 계속 소리칩니다. 늦게야 사람들이 도착했지만, 이미 늑대가 양을 많이 물어간 뒤입니다. 소년은 불만을 터뜨립니다.
  • 그때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말합니다. “거짓말쟁이는 맞는 말을 할 때조차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단다.”

제가 어른이 되고, 다시 읽으며 의문이 들었습니다. 첫째, 양치기 소년이나 그 부모가 양의 주인일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늑대가 나타났다”는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급히 달려왔다는 것에 저는 주목합니다. 아마도 양은 마을 사람들의 공동 재산일 것이고, 소년은 늑대가 나타날 때 소리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라고, 즉 마을 사람들과 소년은 본인-대리인(principal-agent) 관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째, 이 이야기를 양치기 소년이 하고 다녔을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두 번 달려왔으나 늑대를 발견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일 것으로 저는 추측합니다.

셋째, 처음 두 번은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으나 늑대가 안 보였습니다. 소년은 늑대가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책마다 줄거리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은 소년이 심심해서 일부러 거짓말을 하려고 생각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년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줄거리의 첫머리에 있는 “거짓으로”라는 네 글자를 빼고 다시 읽어 보고, 소년이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소년이 처음에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친 상황은 실제로 이랬을 수 있습니다.
  • 양치기 소년은 양이 풀을 뜯는 것을 보면서, 주위를 살피고 있습니다. 멀리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소년은 급히 나무 위로 몸을 피합니다. 그리고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으나, 어느새 늑대는 재빨리 숲속으로 사라진 뒤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늑대가 나타났으나 도망갔어요” 라고 말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허탕친 기분으로 돌아갔겠지만, 소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입니다.
  •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일이 한번 더 일어납니다. 며칠 뒤에도 소년은 양을 돌보면서 주위를 살피고 있습니다. 며칠 전 늑대가 나타난 근처 덤불이 흔들립니다. 거뭇거뭇한 무언가가 움직입니다. 소년은 이번에도 몸을 피하면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칩니다. 덤불에서 어떤 짐승의 몸 일부가 보였으나 사라집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까 저기에 보였으나, 도망갔어요” 라고 말합니다.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소년이 늑대를 똑똑히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며칠 전에 늑대가 나타났을 때와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소년의 임무는 양을 지키는 것이고, 할 수 있는 행동은 마을 사람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위험이 닥친 뒤에 행동하다가는 너무 늦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로 위에서 상상한 소년의 행동은 올바른 대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이나 허탕친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늑대가 보였다는 곳에 가서, 방금 만들어진 늑대 발자국이 있는지를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몰래 숨어서 소년의 행동을 감시할 사람을 붙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년이 거짓말한 것으로 밝혀지면 크게 꾸짖어야 했습니다. 만약 소년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으면 다른 소년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 일을 맡겼으면 소년이 세 번째로 외쳤을 때도 달려왔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 전에 소년이 거짓말을 했든 하지 않았든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고, 세 번째는 많은 양을 잃었습니다.

(2014년 가을, 어느 육교 아래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큰 사고가 발생하고 나면 누구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안전을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을 귀찮게 여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매우 작은 확률로 매우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학교에서 아래와 같이 소방훈련(fire drill)을 한다고 합니다.
  • 소방서 담당자가 예고 없이 학교를 찾아와서 경보 사이렌을 울립니다. 그때가 수업 중이든 점심 시간이든,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춥니다. 예정된 통로로, 예정된 장소로 대피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 걸린 시간이 기준 시간보다 길면 이 훈련을 다시 합니다. 이런 일을 한해에 일곱 번이나 여덟 번 정도 합니다. 교사들도 교장조차도 그 날짜를 미리 알지 못합니다.

이런 훈련을 꾸준히 받고 나면, 일단 사이렌이 울렸을 때 사람들이 다들 침착하게 대피할 수 있습니다. 진짜로 화재가 발생한 경우에도 훈련인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을 수 있고, 진짜 화재인 것을 알아도 몸에 익은 방식으로 대피할 수 있습니다. 사이렌이 울릴 때 사람들이 일단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부가 하는 많은 일이 정부가 국민을 믿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예를 들어, 119에 신고가 들어오면 그 신고를 믿고 출동합니다. 만약 거짓 신고임이 밝혀지면 신고자는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받습니다. 바로 그 신고자가 그 뒤에 다시 신고하더라도 또다시 출동합니다. 신고 내용이 진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가 하는 많은 일은 국민이 정부를 믿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큰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거나, 발생한 직후에는 더욱 정부를 믿고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조치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우가 있다면, 이후에 그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지만, 일단 비상 상황에서 개별 행동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최근의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서 이 점을 걱정했습니다.

※ 이 글은 서울행정학회 뉴스레터 2014년 여름호 (통권 25호)에 실렸습니다.

댓글

  1. 믿음이 사회의 힘을 더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정책을 시행하는 사람들이 가진 의도나 진정성에 대해 의심했던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정책을 믿고 따랐을 때 오히려 손해를 본 기억은 여러 번 있습니다. 진정성이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또 위의 글에서 말하는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을 물어야"하는 부분만해도 저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봅니다. 믿음은 역설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미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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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씀하신 "손해를 본 기억"에 대해 공무원의 한 사람으로서 죄송합니다. 진정성만이 아니라 바른 판단과 행동을 하도록 늘 유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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