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만드는 문서는 이러해야

저는 십여년간 아래아한글을 주로 쓰는 정부 부처에서 일했습니다. 문서를 작성, 검토, 보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근래에 돌이켜 생각해 보았습니다.
  • 실무를 하는 사람이 "읽을 사람을 고려한 분량"에 크게 신경씁니다. 바쁜 윗사람을 위해 긴 내용도 5쪽 이내로 정리하고, 5쪽도 많다 싶어 1쪽으로 요약까지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보고서에서 필요한 내용이 축약되고, 논리가 감추어지고, 맥락이 왜곡되는 일이 나옵니다. (어느 기사 http://goo.gl/xJI8FV 를 보니, 정부만이 아니라 많은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 내부 보고용 문서를 개조식으로 작성합니다. 제법 긴 문장도 조사와 어미를 잘라서 한줄로 끝냅니다. 문제점을 하나만 지적해도 되는데 괜히 두개나 세개로 쪼갭니다. 없는 문법도 만들어 냅니다. 억지로라도 페이지 맨아래까지 내용을 채웁니다.
  • 아래아한글은 표와 글자모양 편집하는 데 탁월합니다. 복잡한 표도 잘 만듭니다. 글자 장평과 자간을 줄여 원하는 폭으로 딱 맞추어 냅니다. 그러나 HTML이나 MS-Word 파일로 변환하기만 해도 모양이 크게 달라집니다. 오랜 기간이 흐르면서 특정 워드프로세서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 오로지 "사안에 따른 적절한 분량"이 있을 뿐입니다. 이 분량을 윗사람이 소화할 수 없다면, 독해속도를 높이거나, 위임을 확대하거나, 적임자에게 넘기는 게 맞습니다.
  • 개조식은 무척 긴급 사안이나 대수롭지 않은 회의자료 용으로만 허용되는 게 맞습니다. 보고서, 특히 기록으로 남길 문서라면, "간결한 문체로 된 단편소설" 또는 "잘된 분석기사"처럼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1) 서술식 문장, (2) 구글 번역기에 돌려도 될 정도로 간결한 문체, (3) 한 문장만 빼도 흐름이 무너지고, 한 문장만 더 넣어도 군더더기가 되는 흐름.
  • 편집한 파일이 OpenOffice나 LibreOffice 같은 오픈 소스 워드프로세서로도 변환이 되도록 단순하게 편집하는 게 권장되어야 합니다. 표 구조가 단순해지고, 장평과 자간을 손대지 않습니다. Open Document Format (ODF)으로 변환이 가능하다면, MS-Word로도 변환이 잘 될 것입니다. ("오픈도큐먼트" 위키 항목: http://goo.gl/U6d4Sn 참조)

정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파일을 제공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납니다. 누구든 소프트웨어를 구입하지 않고도 읽거나 서식에 맞게 작성할 수 있는 포맷이 적절합니다. 읽기만 위해서라면 PDF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작성까지 해야 하는 서식 파일이라면 ODF에 따른 파일(확장자는 ODT)이 가장 좋겠습니다.

* 덧붙임: 아래는 OECD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어느 선배가 해 준 이야기입니다.:

"OECD에서 보고서 분량 가지고 회의한 적이 있습니다. 120쪽 되는 보고서의 요약본을 30쪽에서 10쪽으로 줄이는 문제였습니다. 장관들이 읽기 쉽게 줄이자는 거였죠. 그런데 북유럽 어느 나라 대표는 '우리 장관은 120쪽 다 읽기 때문에 요약본 분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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